스테이블코인, 미국은 '은행'이 되는데 한국은 아직도 '밥그릇 싸움' 중
서클·리플의 제도권 진입과 한국의 입법 지연 사태를 보며
여는 글
최근 가상자산 관련 뉴스를 보면서 기시감이 든다. 글로벌 스탠다드는 저만치 앞서 달려가는데, 우리는 운동화 끈을 매는 방법조차 합의하지 못해 출발선에 주저앉아 있는 느낌이랄까.
미국에서는 서클(Circle)과 리플(Ripple)이 연방 은행 설립 승인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오는데, 한국에서는 ‘누가 발행할 것이냐’를 놓고 부처 간 자존심 싸움으로 입법이 해를 넘기게 생겼다.
PG사에서 결제 시스템을 다루는 개발자 입장에서, 이 속도 차이가 가져올 미래의 기술 부채가 벌써부터 걱정된다.
1. 한국: “은행이 51% 가져야 한다” vs “글로벌 흐름 역행이다”
디지털자산 기본법(2단계 입법) 정부안 제출이 10월, 11월을 지나 결국 12월까지 밀렸다. 연내 발의는 사실상 물 건너갔다는 게 중론이다. 핵심 쟁점은 ‘스테이블코인 발행 주체’다.
한국은행의 입장: “은행 중심 (51% 룰)”
한국은행은 스테이블코인이 화폐 기능을 대체할 수 있으므로, 은행이 지분의 51% 이상을 보유한 컨소시엄만이 발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유는 명확하다. 금융안정과 외환 통제. 기존 은행 시스템의 통제 하에 둬야 안전하다는 논리다.
금융위 & 업계의 입장: “시장 적합성 부족”
반면 금융위원회와 핀테크 업계는 반발하고 있다.
- 글로벌 정합성: EU의 MiCA(가상자산법) 기준 발행사 15곳 중 14곳이 전자화폐기관이다. 일본의 엔화 스테이블코인(JPYC)도 핀테크 기업이 발행했다. ‘은행 주도’는 글로벌 트렌드가 아니다.
- 혁신 저해: 은행 조직 특성상 의사결정이 느리고 레거시 시스템이 무거워, 급변하는 블록체인 생태계에 기민하게 대응하기 어렵다.
민주당 민병덕 의원조차 “은행이 51%를 갖고 의사결정권을 갖는 구조는 시장에 적합하지 않다. 가장 순화해서 말해도 옳지 않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결국 국회 정무위는 정부안을 기다리지 않고 독자 입법을 추진하겠다는 강수를 둔 상태다.
2. 미국: 서클과 리플, ‘은행’이 되다
한국이 싸우는 동안, 미국은 이미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갔다. 미국 통화감독청(OCC)이 서클, 리플 등 5개 가상자산 기업에 대해 ‘전국 단위 신탁은행(Trust Bank)’ 설립을 조건부 승인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물론 예금/대출 업무를 하는 일반 상업은행과는 다르다. 하지만 ‘디지털 자산 보관’과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연방 정부의 감독 하에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은행’ 라이선스를 줬다는 점이 핵심이다.
- 제도권 편입: 이제 서클과 리플은 18개월의 유예 기간 동안 자본금과 인프라를 갖추면 정식 금융기관으로 기능한다.
- 트럼프 이펙트: 차기 행정부의 친(親) 가상자산 기조에 맞춰 아마존, 월마트 같은 유통 공룡들도 은행 유사 서비스를 검토 중이라고 한다.
3. 영국: “규제가 너무 보수적이면 혁신 뺏긴다”
재미있는 건 영국의 반응이다. 영란은행이 스테이블코인 규제안(보유 한도 제한, 준비금 이자 지급 금지 등)을 내놓자, 의회 차원에서 “너무 보수적이다”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영국 의원 그룹은 “영국 파운드 연동 코인이 글로벌 시장의 0.1%에 불과한데, 규제만 강하면 자본과 기업이 규제가 유리한 곳으로 떠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미 결제 인프라로 자리 잡은 기술을 ‘실험실 쥐’ 취급하지 말라는 것이다.
4. 현직 개발자의 시선 (Insights)
기술적 ‘속도’와 ‘호환성’의 문제
개발자 입장에서 볼 때, 한국은행이 주장하는 ‘은행 주도 모델’은 기술적으로 우려되는 지점이 있다. 시중 은행의 뱅킹 시스템은 안정성은 높지만, 구조가 복잡하고 변화에 매우 보수적인 거대 모놀리식(Monolithic) 시스템에 가깝다. 반면 블록체인 기반의 스테이블코인은 초단위의 트랜잭션 처리와 스마트 컨트랙트 연동이 생명이다. 과연 은행이 51%의 의사결정권을 쥐고 이 속도를 따라갈 수 있을까? 핀테크 업계 관계자의 “은행은 조직 구조상 글로벌 환경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기 어렵다”는 말에 백번 공감한다.
불확실성(Uncertainty)이 가장 큰 비용이다
업계에서 가장 힘든 건 ‘규제’ 자체가 아니라 ‘규제의 불확실성’이다. 방향이 정해져야 API를 설계하든, 컴플라이언스 로직을 짜든, 인력을 채용하든 할 텐데,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민병덕 의원의 말처럼 업계는 이미 인력 조정과 자금 준비를 하며 대기 중인데, 법이 없어서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은 엄청난 기회비용 낭비다.
결제 인프라의 주도권 상실 우려
미국은 이미 서클을 은행으로 인정하며 달러 패권을 디지털 세상으로 확장하고 있다. 영국도 늦을까 봐 규제를 풀라고 아우성이다. 그런데 한국만 “은행 밥그릇 지키기” 논쟁에 매몰되어 있다면, 결국 나중에 우리는 비싼 수수료를 내고 외산 스테이블코인 API를 갖다 써야 하는 처지가 될지도 모른다.
맺는글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한 코인이 아니다. 미래의 결제 고속도로다. 미국은 고속도로를 깔고 톨게이트를 세우고 있는데, 우리는 고속도로 운영권을 도로공사가 가질지 민자 유치로 할지 싸우느라 삽도 못 뜨고 있는 형국이다.
글로벌 스탠다드(MiCA, 미국 모델)를 참고하여, 밥그릇 싸움보다는 ‘시장 경쟁력’과 ‘기술 수용성’을 최우선으로 한 빠른 입법이 절실하다.